판을 바꾸다

"DSLR 샀다고 다 잘 찍는건 아니다"라는 포스팅(http://www.ymca.pe.kr/m/post/2174)을 읽다가 사진이 처음 나올 당시 그림을 기계로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찾던 결과 사진이 탄생하였다는 말을 읽고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흘러가는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어떤 혁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비유를 하기에 이만한 소재거리도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이 자세를 취하고 화가가 그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립니다. 구도나 얼마나 비율이 맞는지 같은 기술적인 요소를 모두 차치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린다는 행동입니다. 풍경을 기억하기 위해 화가가 밖에 나가 앉아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길고 짧은 획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획들은 하나하나 주관을 가진 사람에 의해 그려집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아니, 같은 소매라도 그리는 사람, 그리는 순간에 따라 생략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획이 먼저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림 전체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시간들의 총합입니다.
사진은 이 판을 통째로 바꾸었습니다. 사진은 순간의 예술입니다. 단위 역시 획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과정도 시간순이 아닙니다. 빛을 잡는 그 순간 한 번에 모든 것이 만들어집니다. 주관에 따라 같은 대상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진기가 단순한 도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테크닉이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찍은 사진 구석구석이 작가가 원하는 서로 다른 기법들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중에 "5%를 바꾸는 것보다 50%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라던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회사를 세운 자기도 떠올리지 못하는 혁신 아이디어를 직원들에게 내라고 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지만 맞는 말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이 말이 그림에서 사진으로 넘어오면서는 극단적으로 보입니다. 똑같은 그림을 5% 더 빨리 그리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순간에 박아 버리는 것은?
이 부분에서 제가 전율했던 것은, 그림에서 사진으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그림을 빨리, 쉽게 그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진의 장점 때문입니다. 더욱이 디지털시대로 들어오고 기술과 예술의 융합 또한 빨라지면서 그림도 디지털로 보관이 가능하고 거꾸로 사진을 그림처럼 만드는 편집기술까지 크게 발전했습니다.
과연 풍경화와 풍경사진, 정물화와 정물사진의 용도가 같아지는 날이 올까요? 추상화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