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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은 해석이다
    사회.경제 2019. 1. 2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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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1970이라는 영화를 늦게나마 보았다. 강남을 주제로 한 영화, 윤락가나 폭력이 주제가 되는 영화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주제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 보지 않는데, 시대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흔히 3부작이라고 넣는 비열한 거리는 아직도 보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대에 나온 영화들은 그 시대를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본 시선을 웬만하면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2000년대 초반의 기억은 작품성이나 스토리를 떠나서 분위기 자체가 마들렌이나 시월애에 잘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그저 한 편의 영화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좋은 영화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작품성도 문제가 되고 스토리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솔직히 다시 볼 생각도 들지 않을지 모른다. 마들렌도 전체적으로는 너무 메마른 느낌이 들어서 지금도 중반부까지만 보고 말고는 한다.
    어쨌든 당시에 만든 작품에서는 당시의 배경과 당시의 정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나름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나온다. 반면 먼 훗날 당시를 추억하고 만드는 영화는 어떨까?
    강남1970은 미리 개발 소식을 듣고 투기를 시작하면서도 투기라는 것을 기회를 잡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조폭들의 이야기이다. 강남땅을 위해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가서 거래를 하는 손 큰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 역시 여기서는 정치와 손잡은 조폭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사람들은 이미 제값을 주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경제에 미친 영향이나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를 떠나 순수하게 당시의 기준에서 벗어나 지금의 눈으로 당시를 바라보면 이렇게 껍질을 미세하게 들어내고 그 아래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는 신정사회였다. 왕정이었지만 왕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사람이었고 신하들 역시 그러한 왕을 보필함으로써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런 사회에서 바라본 상형문자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글자와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읽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기술은 실생활에서도 사용했다면 편리했겠지만 그 자체로 제사의 성격마저 지닌 상형문자는 벽화와 더불어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 글자들을 한자나 한글과는 달리 신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생각했다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만든 모든 작품들을 보자. 소설 람세스, 모세 시절의 고증 차원에서만 등장하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 상형문자, 타로 카드에도 등장하는 당시 벽화 스타일 등 그 모양 자체로 우리를 어떻게 자극하느냐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이 결정된다. 실제 역사는 고의로든 무지로든 흔히 무시된다. 그래서 오래될수록 더욱 다이나믹하다. 그럴수록 편견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오래되어야 가능하느냐 하는 점에서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고대 이집트는 5,000년 전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고대 중국이라고 해서 그 정도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신기하다는 느낌보다도 이질감이 더 커서일 것이다. 그런데 패션에서는 역사라고 해보았자 백 년도 안 되는 비슷한 스타일을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다른 모습으로 응용을 한다. 그러다가 고대 이집트나 프랑스 혁명 당시의 파리 등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널리 퍼져있는 공식들을 모아서 양념을 뿌리듯이 가공을 한다.
    모든 것이 다시 보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된다. 심지어 지금 손에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재료가 된다. 그렇게 가공하는 것이 성공적일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시도 자체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하나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상징성이 있다. 그리고 결국 성공하고 나면 그것 역시 다른 시도를 하게 되는 자극이 되거나, 그 결과물을 다시 가공을 하게 되거나 심지어 몇십 년 뒤에 복고하게 되는 대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가공들이 기억을 헤집어 다시 끄집어내는 역할도 하지만 주로 지금의 관점이 어디에 방점이 찍혀 있는가하는 필터를 드러낸다는 특징도 있다. 강남1970은 돈을 버는 이야기도 궁금하고 조폭의 이야기도 재미가 있지만 당시 정치권이 큰 손이 되던 시절, 그 정치권에 대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는 사실과 함께 사람들이 공감을 한다는, 누구나 당시에도 말은 안했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하고 현재까지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100년이 지나 70년대 강남 개발을 바라보게 된다면 보다 더 큰 역사의 틀에서 바라보고 효과와 부작용을 모두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는다고 하면 동시에 강남1970을 비롯한 70년대를 되짚어 그린 영화와 소설들을 통해서는 2010년대 사람들이 반세기 전을 어떻게 추억했는지 투영해볼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다. 그때가서는 전혀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나라가 전체적으로 폭력적이었다'에서 '그러나'라는 반전이 없는 그저 비난 일변도일수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 이렇게 그때를 그리는 영화가 어느정도는 공감을 얻었다는 것은 동시대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우리도 조선시대 정변들 당시 민심의 기록이 있었다면 조금 더 나았겠지만 없어서 짐작만 하듯이 그때가서는 이런저런 자료들이 많아서 감사할 수도, 너무 많아서 따로 연구할 필요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패션이든 개인적인 고정관념이든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는 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 입력과 출력의 과정에는 하나같이 사람이 있다. 그런 점에서 패션의 향방에 대해 유행 파악 자체뿐 아니라 브랜드별로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는 방향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인기있는 것들이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돈이 보이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 역시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이 세계인으로서의 자각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하나의 큰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을 끌고 가는, 그리고 그 흐름에 끌려가는 수많은 작은 흐름들이 있고, 그것들이 서로 알력을 주고받으며 섞이고 소용돌이치는 그 위에 흔들리는 조각배에 올라 있다. 수면 밑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안다고 해서 무엇이 좋을지 위에서만 있는 상태에서 당장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좋을 일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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