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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구
    글쓰기 2018. 9. 1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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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아련함이라는 단어를 달고 나타난다. 그 아련함은 시간이 만들어 낸 아련함이다. 그 아련함을 아는 사람은 아련함만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느낌이 아련함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래 전, 그 짝사랑이 현재였을 때 간절함이라는 것을, 일종의 병과 같은 그 상태를 겪어 보았어야 한다. 그 간절함은 특징이 있다. 촉감도 없고 실체도 알 수 없지만 상대방이라고 생각하는 그 대상을 향한 갈구는 마치 멀리뛰기를 하고 싶지만 도약을 해야 할 곳에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무력감과 허무함을 동반한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잡지 못했을 경우의 수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력감을 단지 잊고자 하는 열심한 노력의 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환상같은 상상들,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생각과 달리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몇 가지 몸짓뿐.

    이러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련함이 남지만 아련함도 미화된 감정일 뿐이다. 보통은 아련한 것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한 것일 뿐이고 실제 그 상황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반응한 것아 바보같다고 느끼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짝사랑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사무치게 손에 넣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그 대상 자체만 생각하는 것은 남녀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권력, 돈, 재능, 무엇이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속을 끓이던 살리에리는 신을 향해 절규한다. 재능을 가지고 싶지만 재능을 가진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보아야 하지만 정작 자신만이 그 재능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질투 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영화에서는 그가 아련하게 되돌아본다고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치던 간절함과 질투심만큼이나 피부를 벗겨내고 싶을 만큼 후회를 되씹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를 표현하는 것이 내 안의 고민들을 정리해주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데까지는 괜찮았다. 좋은 생각이었고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가 보니 글은 그냥 도구가 아니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았다. 한바탕 수다를 떤 것처럼 쏟아내고 나면 뭔가를 해낸 기분이었다. 다시 읽으면서 이상한 문장들을 고치고 상관 없는 문단들을 지우고 나면 글은 완성이 되었다. 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글을 느긋하게 읽는 것은 남의 글을 읽는 것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더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가 있다.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짝사랑에 버금가는 느낌이다. 종교적인 고양으로 인해 천국이 그리워진다고 할 때의 그 느낌일지도 모른다. 쓰고 싶은 것이 있어 쏟아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쓰는 행위 자체가 미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냥 '뭔가 써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막상 쓰려니 쓸 것이 없을 때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다. 보통인 그럴 때 다시 노트북을 덮곤 하는데 이럴때는 쓰레기같은 글이라도 하얀 화면에 쏟아 내어야 한다. 정 안되면 번역이라도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애국가를 적기도 한다. 아무튼 뭔가 화면에 나타나야 안심이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 것이다.

    써야 하는데 써지지 않는 것과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써야 하는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없었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건 대충이라도 뭔가는 쓸 수 있었다. 주제가 정해지면 판에 박힌 글이라도 쓸 수는 있었지만 쓰고 싶을 때는 막상 생각했던 글도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 구글 Keep이나 dynalist에는 쓰다 만 글이 많이 있다. 도입부나 제목이 생각이 나면 일단 시작을 하고 생각나는 데까지만 쓰다가 저장하고 나오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것은 아무 때나 저장할 수 있는 휴대폰에 하는 것이 유리하다. 어차피 그런 프로그램은 핸드폰에서 작성하더라도 컴퓨터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저장 도구의 제약을 받지 않아 편리하다. 그래서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글들을 그때그때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쓴 글들은 글만 봐서는 티가 나지 않는다. 어차피 다시 편집을 하고 다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던 그 순간들은, 쓰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다가 판을 벌려 주어서 마치 오랜 만에 마주한 추억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듯 하는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쓰던 그 시간은, 다시 생각하면 아련해진다. 그런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어떤 글을 쓸 때 그랬다는 개별적인 기억은 없지만 그 순간에 대한 느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 글을 쓰면서 행복하다고 느낀 거니까. 작가가 아닌 사람 중에 이런 느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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