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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수리타법
    글쓰기 2018. 9. 1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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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으면 옛날에 한창 들었던 이 말이 떠오른다.

    "너, 워드 1분에 몇 타 쳐?"

    실제로 일을 하면서 보니 워드를 치는 속도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보고서들이 페이지가 그렇게 많지 않은 탓도 있고 베껴야 할 정도라면 웬만하면 ctrl-C, ctrl-V로 해결이 되는 탓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각보다 엑셀 작업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워드 작업이 절대적으로 많았다면 워드를 빨리 치는 것이 효율을 올리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훨씬 많다.

    노트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려 놓으면 글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올 때는 유리하다.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모니터에 옮겨야 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워드 작업이라고 보아도 무난할 정도일 때도 있다. 하지만 생각의 진행이 느릴 때가 문제이다. 한 문장 생각이 나는 대로 치고 마침표를 찍고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조바심이 날 수가 없다.

    '이대로 글이 끝나는 게 아닐까?'

    '저 위에서 이쪽으로 왔는데 다시 돌아가야 하나? 결론을 어떻게 내야 하지?'

    하는 잡생각이 절로 난다. 이것이 단순한 워드 작업일 수도 있다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잡생각 때문에 다시 글이 막히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그래서 그럴 때는 핸드폰을 꺼낸다. 노트북으로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는 이런 뜻이다.

    '글이 막힌다. 모니터에 찍히는 속도가 글이 나오는 속도에 맞춰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핸드폰을 들고 치지는 않는다. 엄지로 치면 그것도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짧게 짧게 메모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긴 글을 쓸 때는 결국 막히게 되어 있다. 중간중간 오타가 생기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오타도 문제이다. 오타를 한두 개씩 고치다 보면 결국 글은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핸드폰을 책 상에 놓고 양쪽 검지를 사용해서 독수리타법으로 글을 쓴다.

    독수리타법은 그냥 한 번 따라해 보다가 건진 습관이다. 처음 타자기가 나왔을 때 그때까지는 손으로만 글을 쓰던 시람들이 빠른 속도로 글을 쓸 수 있겠다며 타자기를 구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손글씨의 속도로 쓰더라도 다시 알아보기 쉽게 고칠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실 워드프로세서는 다량의 편집 용도로 특정화된 것이 아닌, 글을 쓰기 위한 용도라면 손글씨 속도만 나와도 충분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타자기를 독수리타법으로 사용란 작가들도 많이 있었고 말이다. 나는 처음에 '트럼보'라는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몇 부분을 빼고는 당시를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 영화에서 '로마의 휴일'과 같은 명작을 써냈던 트럼보는 내내 독수리타법으로 일관했다. 천천히 고민해 가며 쓰고 다시 읽고 고치고 쓰는 과정이 느리게 진행되어 갔다. 마치 강물이 보이지 않게 흐르듯이 느리지만 끊임없이 글은 진행되고 그 글 안으로 아이디어도 쉼없이 녹아들어갔다. 이것은 사실 '느리지만'이 아니라 '느리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글에 녹아들 여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빠르게 쓰고 종이를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다면 고민을 한답시고 멍하게 있는 시간조차 아까웠을 것이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굳이 키보드를 느리게 치려고 노력하는 또 하나의 짐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핸드폰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휴대폰에서 두 검지를 이용해서 독수리타법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확실히 엄지로 쓰는 것보다 오타는 줄고 컴퓨터에서 쓰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린다. 아직은 이렇게 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속도가 맞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블로그 글에만 이런 식의 과정을 거쳤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장문의 보고서를 쓸 때 개요를 잡는다거나 디테일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수정할 때에도 사용한다. 글 자체보다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 얼마만큼 내 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가가 내 글이 타성에 젖은 일반적이고 흔한 글이 될지 열정으로 가득찬 글이 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핵심은 중심에 있고 우리는 양파처럼 그 중심을 둘러싼 환경에 먼저 눈이 간다. 여기서도 어쩌면 독수리타법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 생각은 이렇다. 글을 쓰면서도 글쓰기 자체가 글에 풀어 넣을 것들을 생각해 내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 핵심일지 모른다고. 그리고 내 경우에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글쓰기 그 자체였을지 모른다고. 그 결과 아직까지 더 혁신적인 발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손글씨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내었다. 더 절실해지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개선을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생활에 밀려 글쓰기를 중단하는 지경에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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